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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길박물관 제17기 <박물관 대학>… 『옥소고(玉所稿)』 옥소 권섭 선생의 여행 발자취

보도자료

by 황식 행정사 2024. 9. 1.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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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시(시장 신현국)829() 옛길박물관 제17<박물관 대학> 4차시 옥소 권섭 선생의 여행 발자취를 담은 옥소고(玉所稿)편으로 강의는 최호석 교수(국립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가 맡았다. 강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기록광, 옥소(玉所) 권섭(權燮)

 

20201126, 옛길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옥소(玉所) 권섭(權燮, 1671~1759)옥소고(玉所稿)가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55호로 지정되었다.

 

 

옛길박물관에 소장된 옥소고(玉所稿)는 총 17책으로, 여기에는 시() 4, () 2, 문답(問答) 1, 유행록(遊行錄) 2, 잡저(雜著) 1, 잡의(雜儀) 1, 사고(私稿) 1, 사집(私集) 2, 추명지(推命紙), 붕유창수(朋遊唱酬) 2책 등이 있다.

 

 

그리고 이보다 조금 앞선 201566일에는 제천의병전시관에 기탁 보관 중인 옥소고(玉所稿)가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364호로 지정되었다. 제천의병전시관에 보관 중인 옥소고(玉所稿)는 총 46책이다.

 

옥소고(玉所稿)는 조선 후기 문인인 옥소(玉所) 권섭(權燮)의 문집 초고본으로, 그의 자는 조원(調元), 호는 옥소(玉所) 무명옹(無名翁) 옥소산인(玉所山人) 백취옹(百趣翁) 등을 사용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이조참판 권상명(權尙明, 1652~1684), 어머니는 용인 이씨로 좌의정 이세백(李世白, 1635~1691)의 딸이다. 아우는 대사간 권영(權瑩, 1641~1721), 작은 아버지는 이조판서 권상유(權尙游, 1656~1724)이다.

 

그의 처는 경주 이씨로 백사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증손인 삭녕군수(현 경기도 연천군포천군) 이세필(李世弼, 1642~1718)의 딸이며, 처남 이태좌(李台佐, 1660~1739)는 우의정 등을 역임하는 등 옥소(玉所)의 처가는 소론의 명문가였다.

 

그러나 관직에는 큰 뜻을 두지 않고, 명리(名利)를 초월하여 제천일대와 문경 등을 근거지로 하여 문필(文筆)과 탐승(探勝)에 힘을 쏟다가 89세 세상을 떠난다.

 

다만 그는 당대 명문가의 일원이라는 것을 배경으로 하여 동시대 어느 누구보다 다방면에 걸쳐 매우 다양한 경험을 하였으며, 이러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방대한 분량의 글로 남긴 것이 바로 옥소고(玉所稿)이다.

 

여기에는 한시시조가사한역소설(韓譯小說)몽기(夢記)유행록을 비롯하여 다양한 분야의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수많은 그의 글 중에서 가장 먼저 학계의 관심을 받은 것은 그가 남긴 2편의 가사와 75수의 시조였다.

 

옥소 권섭은 국문 작품으로 송강 정철(80), 노계 박인로(67), 고산 윤선도(75) 등에 비견할 수 있는 작품을 남기고 있으며, 조선시대 탐승 문인으로는 매월당 김시습, 교산 허균, 난고 김병연(김삿갓), 우담 정시한과 함께 5대 탐승가에 포함될 만큼 산천경개 탐승에 한평생을 보낸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옥소에 대한 연구는 그의 구문시가의 집중되다가 2000년대 들어 다양한 방면에서 옥소를 살피기 시작하였다. 최호석(2001)이 옥소가 국문소설을 한문으로 번역한 <번설경전(飜薛卿傳)>을 살펴봄으로써 국문시가 일변도였던 옥소에 대한 관심을 다른 분야로 확장 시켰으며, 문경새재박물관의 의뢰를 받아 이창희가 번역한 내 사는 곳이 마치 그림 같은데(2003)는 옥소 권섭에 대한 학계의 주목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이창희장정수최호석이 옥소의 문집 초고본인 옥소고(玉所稿)를 영인 간행하고, 이창희 등의 2권의 연구서를 펴내는 한편, 옥소의 여러 저작물이 번역되면서 옥소 연구는 질적 성장을 위한 새로운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

 

현재까지 간행된 옥소 관련 연구서와 번역서는 다음과 같다.

 

자료

- 이창희장정수최호석 편, 옥소고, 도서출판 다운샘, 2007.

번역서

- 이창희 역, 내 사는 곳이 마치 그림 같은데 - 옥소의 꿈세계, 도서출판 다운샘, 2003.

- 문경새재박물관 엮어 옮김, (옥소 권섭의 유행록) 삼천에 구백리 머나먼 여행길, 민속원, 2008.

- 이창희장정수 옮김, 옥소 산록, 도서출판 다운샘, 2022.

연구서

박요순, 옥소 권섭의 시가 연구, 탐구당, 1987.

이창희 외, 18세기 예술사회사와 옥소 권섭, 도서출판 다운샘, 2007.

이창희 외, 옥소 권섭과 18세기 조선 문화, 도서출판 다운샘, 2009.

문경시장 편, 옥소 권섭의 세계 인식과 문경, 문경시 문화예술과, 2022.

 

옥소에 대한 연구는 위에서 제시한 저역서 외에도 십여 편의 석박사학위논문과 수십여 편의 논문이 있다. 최근 들어 옥소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해지고 있는데, 이는 옥소의 글 자체가 자진 가치와 함께 당대 정치사회문화예술 등에 대한 귀중한 가치도 함께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2. 옥소의 문집 편찬 구상과 옥소고의 현황

 

옥소는 8세 되던 해에 <제생희, 弟生喜>라는 제목의 시를 쓴 이래, 다종 다양의 수많은 글을 지었다. 그리고 말년에 이르자 자신의 글을 정리하여 문집으로 편찬할 생각을 가진 듯하다.

 

그리하여 옥소는 문집을 편찬하기 위하여 자신의 저작물을 정리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초고본(草稿本)으로 추정되는 옥소고는 옥소의 장남인 초성(初性, 1689~1723)의 후손에게 전해진 제천본 옥소고3남 선성(善性, 1712~1784)의 후손에게 전해진 것 문경본 옥소고의 두 종류가 있다.

 

제천본과 문경본이라는 이름은 초성(初性)과 선성(善性)의 후손들이 대대로 각각 제천과 문경에 살아왔기 때문에 붙인 것이다.

 

한편년 옥소 자신의 밝힌 문집 편찬의 구상은 다음과 같다.

 

모두 40권이 넘는 내 글 가운데

① 「산록 내편(散錄 內篇)잡의(雜儀)잡지(雜識)만을 후손들에게 유익한 것이니 따로 분류해 두는 것이 좋다.

② 「기몽(記夢)화몽(畵夢), 가곡(歌曲)유행(遊行), 문답(問答)묘산(墓山), 정각(亭閣)등의 글은 다른 데로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는 것이 좋다.

③ 「산록 외편(散錄 外篇)(잡록(雜錄)(), 잡저(雜著)등은 좋은 글들만 골라내고 나머지는 버리는 게 좋고

④ 「필찰(筆札)추명지(推命紙)는 그대로 두는 것이 좋다.

⑤ 「창수(唱酬)는 골라내고 나머지는 버려도 좋고

⑥ 「정식(程式)은 모두 벼려도 좋다.

⑦ 「()13권 가운데 내가 스스로 골라내 7~8권을 만들었는데 이 중에 골라내고 또 골라내서 두세 권으로 만든 다음 다시 골라낸 것들 중에 또 정밀하게 골라야만 흠결이 없게 될 것이다.

 

덕성(德性)과 선성(善性) 부자가 조응(祚應)과 함께 깨끗이 정돈하여 한 질을 만들어, 전하여 보여줄 만한 사람에게 전하여 주여주는 것이 좋다.

 

나머지는 모두 환지(還紙)로 만들어 굴뚝이나 벽을 바르는 데 사용하는 것이 좋다.

 

한천과 화지에 각각 한 부씩 두되 한천에 둔 것은 도중(道中)이 글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잘 지켜서 사당 안에 보존해야 한다.

 

내가 죽음을 앞두고 글들을 태우려고 했으나 아이들이 만류하여 여기 한적한 곳에 보관해 둔다.

 

, 대대로 글공부를 한 집안인데 나에 이르러 이렇게 노둔하게 되었으니 이 운명을 어찌하겠는가? 하늘에 묻고 싶어 울면서 슬퍼한다.

 

인용문에 따르면 옥소는 그때까지 40권이 넘는 글을 남겼는데, 19종에 해당하는 자신의 글을 밑줄 친 것과 같이 7가지로 분류한 뒤 각각의 처리 방안을 제시하였다.

 

옥소의 문집 편집 구상에 따라 글을 분류하고, 그에 대응하는 초고본 옥소고의 현황을 제시하면 표와 같다.

 

 

3. <영삼별곡(寧三別曲)>으로 읽는 옥소의 영월~삼척여행

 

 

옥소 권섭은 당대 명문 사대부가에서 출생하였으나 일찍이 세속의 명리에 뜻을 버리고 평생 전국을 두루 다니며 탐승을 즐긴 여행가이다.

 

그에게 있어 여행은 거의 신앙과 같은 것이었다.

54세 때 이미 그동안 구경한 숲과 샘, 산과 도랑, 바위와 계곡, 정각과 누대가 수백 수천 곳이나 되었고, 감영(監營)과 부(), (), ()을 구경한 것이 무릇 182군데나 되었다.

 

그렇게 여행을 많이 다녔으면서도 여행에 대한 갈증이 늘 있었던 그는 국내 산천을 두루 다니지 못한 것을 자신의 평생 한()으로 꼽기도 하였다.

 

5세 때인 1675년에 어머니를 따라 외조부 이세백의 임소인 강원도 홍천군의 범파정(泛波亭)에서의 물놀이를 시작으로, 18세 대(1688)에는 외조부의 임소인 남한산성에 가서 그곳에 있던 망월사와 옥정사 등의 9개의 절과 동서남북 사장대(四將臺)를 올랐으며, 이어 장인인 이세필의 임소인 삭년군에 가서는 우화정과 적벽을 구경하였다.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그의 산수 유람을 87세의 나이에 함경도 여행을 다녀오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의 일생 가운데 가장 기억할 만한 여행으로는

먼저, 34세 때(1704) 한 달가량 장인 이세필의 임소인 삼척을 방문하고 이어 동해태백산영남좌도소백산 일대를 여행한 것을 꼽을 수 있다.

 

이 여행은 그의 인생에서 본격적인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 그는 이 여행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기행록을 작성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두 번째 39세 때(1709) 강원도 관찰사로 있던 처남 이태좌의 지원을 받아 133일간 관동팔경을 비롯한 강원도 일대와 금강산 등을 유람한 것도 그의 인생에 의미가 깊은 여행이었다.

 

세 번째 그의 인생 말년인 87세 때(1757) 함경도 관찰사로 있던 사촌 동생 권혁(權爀, 1694~1759)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넉 달에 걸친 관북 유람은 그의 여행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한 여행이었다.

 

1704, 옥소 권섭의 인생에서 본격적인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34세 때의 여행부터 전체적인 여정과 함께 자신이 들렀던 명소에 대한 설명과 그에 대한 소감, 여행에서 경험하였던 특이한 풍습과 사건들에 대하여 상세하게 적기 시작하였다.

 

옥소가 이 여행에서 큰 감흥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동남행추기(東南行追記)라는 기행록과 함께 영월에서 삼척까지 여행한 경험을 노래한 가사 <영삼별곡(寧三別曲)>을 지은 데서도 확인된다.

 

조선 전기의 기행가사는 대체로 지방관으로 임명된 작자가 임지로 가면서 본 명승지를 소개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기행가사에는 승경(勝景)에 대한 것과 함께 자신에게 벼슬을 내려 준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는 한편, 목민관으로서 선정(善政)을 다짐하는 것이 주 내용을 이룬다. 따라서 왕명에 의한 지방관 부임이 이들 기행가사에 나타난 여행의 동기가 된다.

 

조선 전기 기행가사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정철(鄭澈, 1536~1593)<관동별곡(關東別曲)>은 바로 이러한 동기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관동별곡>은 정철이 유배지인 고향 창평에 있다가 임금으로부터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을 받고 금강산과 관동 팔경을 유람하며 아름다운 경치와 고사, 풍속 등을 여정을 따라 노래한 기행가사이다.

 

유배지에서의 은거 생활은 강호 자연에 대한 애호 때문이라고 포장하였던 그였지만, 임금의 부름을 받은 그는 성은이 망극하다며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그리고는 바로 한양으로 가서 임금을 뵙고 임지로 떠난다.

 

여기에서 보듯이 정철이 <관동별곡>을 짓게 된 동기는 왕명에 의해 강원도 관찰사에 부임하게 된 데에 있으며, 이 작품은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후대 기행가사 창작에 하나의 롤모델로 역할을 했다.

 

반면 옥소 권섭의 <영삼별곡(寧三別曲)>은 왕명을 받은 지방관이 아닌, 개인이 여행을 하면서 창작한 기행가사로, 권섭과 교류하였던 이병연은 이를 <관동별곡>의 뒤를 이었다는 의미로 <관동후곡(關東後曲)>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제목에서 영삼(寧三)’은 여행의 출발지인 강원도 영월(寧越)과 도착지인 강원도 삼척(三陟)’의 머리글자를 딴 것인데, <영삼별곡>은 당시 제천에 머물고 있던 작자가 영월을 거쳐 당시 삼척부사로 있던 장인의 임지인 삼척까지 유람한 내용을 기반으로 창작한 가사이다.

 

여기에는 주요 일정과 행선지 이동 방법, 그날의 날씨, 여행 중에 경험한 것까지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영삼별곡>30년이나 세상에 쓰일 데가 없어 헛되이 세월을 보냈다는 화자의 고백으로 시작된다.

 

화자는 관직에 오르지 못한 자신의 처지에 연연하지 않고 호탕하게 물외(物外, 바깥세상)의 인연을 따라 녹수청산으로 대표한 강호 자연을 노닐며 사는 것을 자신의 분수로 삼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갑자기 병이 들어 버린다.

그런데 뒷절에서 내려온 승려의 진단에 따르면 화자의 병은 자연에 든 병으로 자연에 대한 애호가 지나쳐 생긴 것이었다.

 

그러자 승려는 화자에게 늦은 봄, 좋은 계절을 맞아 청려장 짚고 어디든 가자고 한다. 이에 화자가 창을 열고 보니 좋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맑은 바람은 살랑불고 새들이 지저귀는 가운데 시냇가 풀밭 길은 동쪽 계곡으로 이어져 있다.

 

여기서 집을 떠나보라는 승려의 권유는 화자 자신의 자연 탐닉을 합리화하는 하나의 장치로 쓰인 것으로, 여행의 목적이 자연을 완상하고 풍류를 즐기는 그 자체에 있음을 시사해 준다.

 

그렇게 때문에 여행은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채로 갈대로 가는 것이며, ‘아이종 불러내어 뼈 걸린 여윈 말에 채찍을 걷어쥐고 마음대로 놓아 가는 아주 한가롭고 여유로운 것이다.

 

이처럼 <영삼별곡>에서 나타난 여행의 동기는 전대 기행가사와는 달리 단지 아름다운 산수 자연을 찾아가 즐기고자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었다.

 

 

 

이처럼 좋은 봄날에 길을 떠난 화자는 말 등에 올라 석양이 될 때까지 잠시 잠에 빠진다. 그리고 꿈속에서 봉우리와 골짜기를지나친 화자는 어느덧 첫 목적지인 강원도 영월에 도착한다.

 

영월의 주천에서 발원한 물은 청령포로 흘러가는데, 청령포에는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에 세상을 떠난 단종의 사당이 있다.

 

화자는 잠깐 말에서 내려 단종의 사당에 사배(四拜)’를 화면서, 비통한 마음에 소리내어 운다. 주위를 둘러보니 절벽은 높이 늘어섰고 사람의 발자취는 찾을 수가 없다.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었던 단종이 복권된 것은 숙종 24(1698)이므로, 권섭이 청령포에서 단종의 사당 참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번 여행이 단종의 복권이 이미 내려진 이후의 일어었기 때문일 것이다.

 

화자는 단종의 사당에 참배를 마치고 영월을 본격적으로 돌아보기 위하여 동강가로 향한다.

 

그런데 화자 일행이 목격한 것은 물가에 사공은 간데없고 빈 배만 놓였는 광경이다. 이에 화자는 삿대를 손수 잡고 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금강정에 이른다.

 

화자는 금강정에 올라 주변 경관을 조망하는 가운데 영월에 있는 봉래산(蓬萊山)’ 제일봉에 어린 구름을 보면서 신선(仙翁, 늙은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을 떠올린다.

 

한편 옥소는 여행자로서 승경(勝景)이나 역사 유적, 그리고 지나는 곳의 특이한 풍속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 사대부가 무심히 보아 넘기기 쉬운 서민들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에도 시선을 둔다.

 

 

금강정에서 봉래산 제일봉의 구름을 본 화자는 다시 길을 떠나 산 밑에 있는 운리촌(雲離村)“이라는 곳에 들어간다. ‘청산벽계수에 둘러싸인, 지나가는 나그네도 없어 개와 닭만이 한가하게 노닐고 있는 산골 마을 운리촌의 한적한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귀리밥에 풋나물이 올라간 자리(蒲團, 부들방석)을 펴 놓고 정성껏 손님을 대접하는 모습은 저절로 마을 사람들에 대한 감탄을 자아낸다.

 

이후 화자는 대관령, 평창의 청옥산 등을 거쳐 장인의 임소인 삼척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영삼별곡>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 한다.

 

화자는 달빛 아래에서 신선이 마신다는 유하주를 마시다가, 문득 가슴이 시원해지면서 금방이라도 날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이에 고양된 감정을 화자로 하여금 한평생 세상의 근심과 즐거움(憂樂)을 몰랐으니 꿈을 꾸는 듯한 속세의 영욕또한 자신이 알 바가 아니라는 진술을 끌어낸다.

 

다만 화자가 원하는 것은 패랭이와 짚신이 떨어지도록 산림(山林)과 호해(湖海), 즉 자연에서 노니는 것이었다.

 

옥소는 자연 속 승경을 찾아 그 속에서 노니는 것 자체가 중요할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여행이 끝나고 나서도 일상으로 복귀하기보다는 새로운 떠남을 생각하면서 자연 속에서 풍류를 즐기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다.

 

4. <해산록(海山錄)>으로 읽는 여행의 즐거움

 

옥소는 39세 때(1709), 133일에 걸쳐 관동팔경을 비롯하여 강원도 일대와 금강산 등을 유람한다.

 

이때 강원도 관찰사로 있던 처남 이태좌가 석 달 치 여행 자금을 도와주고, 3남 선성(善性)의 장인인 송규현(宋奎鉉)은 영월부사로 있으면서 술자리를 베푸는 한편 양식과 반찬을 도와준다.

 

이와 같이 처남과 사돈 덕택에 물질적으로도 넉넉하고 주변 사람에게 위신도 세울 수 있었으며, 여기에 아름다운 경치까지 더해져 오랜 기간에도 불구하고 옥소의 관동 여행은 매우 즐거웠다.

 

한껏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한 옥소는 이 여행의 기록을 독창적이면서도 내용이 풍부한 장편의 산수유기(山水遊記) 해산록(海山錄)으로 남긴다.

 

일반적으로 산수유기는 첫머리에 유람의 동기가 서술되고 이어 함께 유람한 사람, 여정에 따른 서술이 이어진다. 그리고 여정을 기록할 때 일자와 그날의 기후, 유람한 곳과 이동 거리, 산수의 경관 묘사와 유람 중 느낀 일 등을 서술한다.

 

그러나 옥소의 산수유기는 이와 사뭇 달라 산수유기 일반의 형식을 따른 작품이 거의 없다.

 

<일과기(日課記)>가 있었으나 잃어버려 훗날 다시 그 얼개만 기록한 것, 과거 유람의 기억을 더듬어 다시 쓴 것, 타인의 유람 기록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일반 유기의 형식을 준용하여 일기체로 서술하된, 날씨, 이동 거리, 그날의 주요 유람지 등만 서술하고 자신의 감상을 배제시킨 것 등이 있다.

 

그리고 여기서 소개하고자 하는 자신만의 독창적 체재로 서술한 <해산록(海山錄)> 등은 일반적인 산수유기의 형식과는 구별이 된다.

 

특히 옥소 권섭의 <해산록>은 일정에 따라 여정을 순착적으로 서술하면서 견문과 감정을 서술하는 일발적인 산수유기와 달리 각 내용에 따라 편을 나누고 이를 표제로 삼았다.

 

 

옥소가 평생에 걸쳐 전국을 유람하며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친척이 전국 각지에 목민관으로 있으면서 그에게 물질적 지원을 하였던 것과 산수에 대한 그의 특별한 애호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하자면, 여행 과정에서 얻은 다양한 즐거움이 옥소가 87세에 이르기까지 여행을 지속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행의 즐거움 중에서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완상(玩賞, 즐겨 구경함)의 즐거움일 것이다. 아름다운 경치를 찾아 마음껏 즐기는 것은 바로 눈의 즐거움을 위한 것으로, 고자(告子)가 맹자(孟子)에게 말한 본성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리고 옥소의 표현에 따르자면, 좋은 경치를 찾아 노닐며 구경하는 것에 대한 욕심은 식욕이나 색욕과 같은 것이었으며, 한 번 아름다운 경치를 본 뒤에는 그것에 대한 정이 깊어져 그에 대한 욕구는 식욕이나 색욕보다 더 심한 것이도 하였다.

 

옥소 또한 현실의 고단함을 벗어나 산수를 완상하고 풍류를 즐기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여행의 과정에서 만난게 되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그의 여행 중에서 완상의 즐거움은 가장 많이 안긴 것은 39세 때(1709) 석 달에 거쳐 두루 둘러본 관동 유람이었다.

 

여행이 주는 두 번째 즐거움은 현실에서 일탈이라고 할 수 있다.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자유로운 공간과 시간을 갖거나, 잠시라도 사회적 규범이나 윤리에서 벗어나보는 것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방편으로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것이 바로 여행이다.

특히 옥소의 경우 자신을 둘러싼 현실 세계가 매우 불만스러웠기 때문에 현실을 벗어나기를 더욱 소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산으로 드나들면 몸과 마음이 편안해져 슬프고 괴로운 생각을 잊어버리지만 집에 돌아와 앉으며 옛날처러 눈물짓는 사람이 되니 도리어 오래도록 유람하지 않고 가벼이 돌아온 것을 한스러워 하였다.

 

이는 옥소가 외지로 여행을 가면 가문의 후광을 입어 잘 대접받는데, 집으로 돌아오면 자신을 푸대접 하는 현실이 못마땅하였기 때문이다.

 

일례로 옥소는 87세 함경도 유람을 떠나는데, 당시 사촌 동생인 권혁이 함경도 관찰사였기 때문에 그는 함흥을 오가는 일정에서 모든 관리들이 옥소를 감사의 형이라고 떠받들어 주는 경험을 한다.

 

그렇지만 문경에 오면 별장(別將)의 아비라하여 자신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는 현실에 대하여 괴로워하였다.

 

그래서 그는 집에 일찍 돌아온 것을 후회하였으며, 더욱 현실에서 일탈하고 싶어 여행을 떠났는지 모른다.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세 번째 즐거움으로 동반의 즐거움을 꼽을 수 있다.

 

옥소가 82세 되던 해(1752) 옥소는 문경에서 서울로 유람을 떠나면서 둘째 아들인 덕성(德性), 동네 사람, 손자 신응(信應)을 동반한다.

 

이 중에서 신응(信應)은 다른 사람과는 달리 옥소의 욕구에 의해 한양의 열 가지 승경을 그리기 위해 따라간 것이다.

 

그리하여 권신응은 조부의 명에 의해 한양의 열 가지 명승을 그림으로 그리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옥소 권섭의 3대 여정은 첫 번째, 34세 때(1704) 한 달가량 여행. 두 번째, 39세 때(1709) 강원도 관찰사로 있던 처남 이태좌의 지원을 받아 133일간 관동팔경강원도금강산 등을 유람한 것. 세 번째, 그의 인생 말년인 87세 때(1757) 넉 달에 걸친 함경도 유람을 꼽을 수 있다.

 

 

이어지는 5차시(95) 강의는 근암서원 소장유물로 만나는 지역 인물 청대 권상일이다. 강사는 채광수 영남대학교 연구교수이다.

 

 

기타 상세한 사항은 문경시 문경새재관리사무소 옛길박물관(경북 문경시 문경읍 새재로944) 054)550-8366으로 문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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