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옛길박물관 제17기 <박물관 대학>… 「청대 권상일」 근암서원 소장유물로 만나는 지역 인물

보도자료

by 황식 행정사 2024. 9. 10. 07:19

본문

 

문경시(시장 신현국)95() 옛길박물관 제17<박물관 대학> 5차시 근암서원 소장유물로 만나는 지역 인물 청대 권상일편으로 강의는 채광수 영남대학교 연구교수가 맡았다. 강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청대 권상일(1679~1759)

 

권상일은 본관은 안동, 자는 태중(台仲), 호는 청대(淸臺)이다.

 

관직은 1710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부터 시작하여 대사간홍문관부제학지중추부사대사헌 등을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을 때 공을 세웠다.

 

학문으로는 퇴계 이황을 사숙하였으며, 저서로는 청대집』‧『초학지남(初學指南)』‧『관서근사록집해(觀書近思錄集解)』‧『소대비고(昭代備考)』‧『가범(家範)』‧『역대사초상목(歷代史抄常目등 여러 권을 남겼다.

 

영조 35(1759)에 졸하니 수가 81세였고, 근암서원과 죽림정사에 제향 되었으며,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7현을 배향한 문경 최고의 근암서원(書院)’

 

서원(書院)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사학 교육기관이자 제향(祭享공간 이었다조선이 건국되고 국가이념 모토를 유학으로 정하면서 공립교육기관인 향교가 정책적으로 먼저 세워 졌으며이후 중종 38(1543)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지금의 소수서원)을 필두로 전국에 크고 작은 사립 서원이 600여 곳 이상 건립되었다

 

국가재정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 사액서원과 사우의 폐단이 오랜 세월 누적되자 흥선대원군에 의해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훼철은 되었지만 조선사회를 지탱하고 인물배출 및 유림의 정신적 위상을 세우는 등 큰 역할을 하였다.

 

문경시 산북면은 당시 상주목 관할로서 중종 39(1544) 상주목사 신잠(申潛, 1491~1554, 신숙주의 손자)이 이곳에 근암서당을 건립했으며이후 지방유림의 공의로 홍언충(洪彦忠)과 이덕형(李德馨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사당을 건립하고 근암서원이라 하였다

 

이후 1693년 김홍민(金弘敏)과 홍여하(洪汝河선생을 추가 배향 하였다현종 10(1669)에 근암서당이 근암서원으로 정식적으로 승격이 되었으며정조 10(1786)에 이구(李榘), 이만부(李萬敷), 권상일(權相一선생을 재차 추가 배향하여 모두 7현의 선현을 모시고 있다.

 

현재 서원은 현재의 건물은 1970년대에 복원된 건물로 전면에는 평기와로 팔작지붕을 올린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강당이 있으며강당 뒤에는 내삼문과 경현사(景賢祠)로 이루어진 사당의 공간이 별도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역시 현재의 건물만으로는 옛 모습을 짐작하기 어렵고 다만 경현사에 사용한 주춧돌이나 경내에 남아 있는 석재를 통하여 과거의 규모와 권위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이곳 사당의 주춧돌이나 축대석으로 사용한 석재 중에는 부분적으로 옛것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있어 눈길을 끄는데그중에서 규모도 작지 않을뿐더러 매우 정교하게 다듬은 것들이 있어 이 서원이 훼철되기 전에는 상당한 규모와 격조가 대단하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곳에는 고호림(高皓林)이 지은복원사실(復元事實)장병규(張炳逵)가 지은복원기(復元記)와 이원영(李源榮)이 지은존성당중건상량문(尊性堂重建上樑文)등의 기문이 걸려 있으며부훤당(負暄堂김해(金楷)의 문집에 근암서원문루중창상량문(近嵒書院門樓重創上樑文)이 전한다.

 

 

청대문집퇴계선생친필어제어필 등 843

 

근암서원 소장유물은 지난 2006 1월 도 유형문화재 제377호로 지정이 되었으며 일괄 843점이다서원에 배향된 인물 중 목재 홍여하우암 홍언충청대 권상일의 문집목판이 대부분을 차지하며청대 권상일의 교지첩지영지가 70여점 있다이외에 청대 선생이 평생을 수집한 서책과 기록물이 많이 있으며이 중 퇴계선생친필청대문집어제어필 등은 매우 귀한 사료라 할 수 있다이 중 일부는 안동에 있는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이 되어 있으며 문집류 등은 청대선생의 후손이 보관하고 있다.

 

 

문화재명 : 문경근암서원 소장유물 (聞慶近嵓書院 所藏遺物)

 

지정일자 : 2006. 1. 2

지정종별 :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지정(92)

지정번호 : 843(일괄)

소장유물현황

- 교령류 : 72교지(敎旨), 첩지(牒紙), 영지(令旨)

- 청대일록(淸臺日錄) : 12(1702숙종28 1759영조35) 50여년간 일기

- 괴원계첩(槐院稧帖) : 1(1712숙종38)

- 낙원기영회첩(洛院耆英會帖) : 1(1724경종4)

- 여사서(女四書) : 41(1737영조13)

 

 

- 어제어필(御製御筆) : 2(1744영조20)

- 황명대통력(皇明大統曆) : 1(영조연간)

- 관동팔경, 여산도(關東八景, 廬山圖) : 1

- 운달산김용사사적(雲達山金龍寺事蹟) : 1(1700년경)

- 어제대훈(御製大訓) : 1(1755영조31)

- 광국지경록(光國志慶錄) : 1(1744영조20)

- 성학십도(聖學十圖) : 1(1744영조20)

 

 

- 퇴도선생필첩(退陶先生筆帖) : 1

- 청대만음(淸臺漫吟) : 1(1724)

- 근암동상하계안(近嵒洞上下稧案) : 1(1700)

- 학성지(鶴城誌) : 1(1749)

- 제명고적(題名古蹟) : 1

- , 연적, 연함(, 硯滴, 硯函) : 1

- 유서통(諭書筒) : 1(1724)

- 합죽선(合竹扇) : 1

 

 

- 청대선생문집(淸臺先生文集) : 326(산북면 서중리 148-1)

 

 

청대일기소개

 

청대일기는 권상일이 숙종 28(1702)부터 영조 35(1759)까지 58년간을 기록한 일기로 현재 30책 중 15책이 전한다.

 

이 일기는 매일매일 책력(冊曆) 위에 간략하게 기록한 것으로 중간에 누락 된 부분을 제외하면 42년분의 일기가 남아 있다.

 

1702(숙종 28)의 일기에는 첫머리에 큰 달 또는 작은달이라고 표시하여 한 달의 일수가 29일인지 30일인지를 구분하고, 기상변화도 세세히 기록하고 있다.

 

또 저자가 공부하는 유생이라 주로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대승사와 김룡사 등에 가서 속성으로 공부하는 이야기와 부친과 저자가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선산이나 안동 또는 한양으로 갔지만 낙방한 이야기 등이 있으며, 당파가 남인이기에 정치적으로 소외되는 데에 따른 마음을 적고 있다.

 

일기 중간중간에 과거시험 연습용으로 쓴 시와 순간순간의 소회를 읊은 시들이 제법 된다.

 

1703(숙종 29)에는 한 냥으로 겉벼 14말을 살 수 있었는데, 가뭄이 들자 1704(숙중 30)엔 한 냥으로 겉벼 5말밖에 못 산다는 사실을 통해 가뭄이나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가 물가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려주는 자료라고 하겠다.

 

1707(숙종 33)은 한해 내내 마마와 전염병이 돌아 아직 마마를 겪지 않은 주인공이 피접(避接,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거주) 하느라 여러 곳을 전전하는 모습과 재취한 아내가 제대로 신행도 하지 못한 채 병으로 피접(避接)하는 모습을 기록하였다.

 

 

4책에서는 숙종의 병증과 처치 방법 및 진행 과정을 하루도 빠짐없이 자세히 기록한 것이 마치 병원 차트 기록과 같아 이 방면의 연구자에게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또 율곡의 이기설이 선()사상과 같음이 있어 문묘종사를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아무래도 학문으로 퇴계가 으뜸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사상성과 당파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5책에서는 1722(경조 2)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으나, 병조 낭청의 실수로 곧바로 관직이 갈리고 송시열을 도봉서원에서 내치는 일로 소청을 설치하여 결국 내치게 되었으며 청나라에서 온 칙사가 은자를 쓸어갔다고 하였다.

 

마을엔 전염병이 돌아 부친이 피접(避接)을 하고 세 잠 잔 누에 정도의 새까만 벌레가 곡식 잎을 갉아먹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집안에까지 들어와 가득하며, 칠곡에서는 산모의 옆구리에서 태어난 여자아이 문제로 관찰사가 장계를 올리는 등의 일이 있었다고 하였다.

 

△ 영조, 초상화(20대, 60대)

 

1725(영조 1) 영조가 새해 달력, 1일부터 10일까지 ()’자를 붙이도록 하였는데, 옛날의 법식은 아니라고 하였으며, 경종의 죽음에 따른 왕대비 인원왕후의 복제를 기년복으로 정했다고 하였다.

 

10책은 1747(영조 23) 10월 초하루부터 1748(영조 24) 2월 말에 체직(遞職)을 허락받기까지의 비교적 짧은 시기의 기록으로 저자 권상일이 사직소를 올렸으나 체직(遞職)되지 못하여 사은숙배(謝恩肅拜) 차 서울에 올라와 1021일에 형조에 첫 출근을 하고 좌기(挫氣)에 참석하는 등 관직 생활이 주 내용이다.

 

그리고 일기의 마지막 달인 227일에 체직을 허락받아 하직을 한 후 서울을 출발해 230일 이천의 음죽에 도착한 것으로 일기가 끝이 난다.

 

12책은 1755(영조 31) 1월부터 1759(영조 35) 2월까지 88면 정도의 분량으로 주로 돌림병이나 흉년으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거나 얼어 죽은 일 및 친척이나 주변 지인들의 소소한 소식들이 주를 이룬다.

 

 

1755, 새해 첫날부터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면서 전국으로 전염병이 퍼져 서울 수구문 밖엔 시체가 산더미이고, 지방에선 한 집안에 떼죽음 당하는 상화(喪禍)가 부지기수라고 하고, 가뭄인가 싶었더니 보리 수확 철에 비가 와서 하천변 밭은 수확기 보리가 다 떠내려가고 수백 년 전에 만든 북천교가 떠내려 갔다.

 

1756(영조 32) 10월엔 문밖으로 머리를 내밀지 못할 정도로 추워졌다고 하였다.

 

돌아가신 부친의 생신날 감회가 새로운데 퇴계 선생이 생신날 차례를 지내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하여 영남에선 생신날 차례를 지내지 않지만, 서울 사대부들은 지낸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권상일의 관료 생활

 

1710(숙종 36) 급제한 해에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관직생활의 첫발을 내딛었다.

 

출사 직후 어머니, 부인, 조모 세 명이 차례로 세상을 따나서 삼년상을 치르고 난 후인 1715(숙종 41) 37세에 저작(著作), 1718(숙종 44) 성균관 전적, 1719(숙종 45) 41세에 성균관 직강(直講) 등을 역임하였다.

 

 

1720(숙종 46) 42세에 예조좌랑을 지냈고, 1722(경종 2) 44세 병조좌랑에 임명되었으며, 1726(영조 2) 48세에는 병조정랑에 제수되었다. 중앙의 관직을 두루 거친 셈이었지만 핵심적인 요직은 아니라는 점에서 노소론 집권기에 고단하던 남인 출신 관료의 어려움을 짐작케 한다.

 

1727(영조 3) 7월 노론이 물러나고, 소론이 정권을 잡는 정미환국이 단행되었다. 소론이 집권하게 되면서 권상일에게도 재출사의 기회가 찾아왔다.

 

1727(영조 3) 49세에 만경현령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외직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듬해인 1728(영조 4) 무신난이 일어났다.

 

당시 권상일은 수령으로 재직하면서 난의 진압에 공을 세운 사실은 무척 다행한 일이었다. 그는 이인좌 일당의 움직임을 신속하게 파악하여 감영에 보고한 후, 한 고들의 수령으로서 대비 태세를 적절하게 잘 취하여 난의 진압에 공을 세웠던 것이다.

 

국왕을 비롯한 집권 세력이 의심을 가지지 않을 정도의 깨끗함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것이 참작되어 1731(영조 7) 53세에 영암군수에 이어 사헌부 장령(4)에 제수되었다.

 

그는 두 차례 올린 사퇴 상소를 통해 명분을 바로 잡고, 수령을 간택하며, 학교를 개수할 것을 간언하고, 과거의 폐단과 당파의 재앙을 논하며, 임금의 마음을 바로 잡기를 청하는 등 현실 문제를 절실하게 진언하였다.

 

이 권상일의 사직 상소 내용에 감동한 영조는 여러 사람이 입시한 자리에서 특별히 권상일을 별도로 불러내어 집안 내력에 대해서도 묻는 등 큰 관심을 보였다. 이때부터 영조는 권상일을 마음속에 둔 듯하다.

 

1734(영조 10) 56세에는 사헌부 장령으로 있으면서 백성들의 조세 부담을 덜어주기를 청하고, 아울러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근절시킬 것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린 바 있었다.

 

경연에도 참석하여 영조로부터 깊은 관심을 받았으며, ‘외모가 참으로 건실한 사람이라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또한 영조는 규례를 벗어나서 장령인 권상일에게 문의(文義)를 강하라고 하는 등 관심을 표하면서 그를 학문을 하는 신하로 간주하여 특별대우를 하였다.

 

이 자리에서 영조에게 영남의 선비들에 대해 아뢰는 기회를 얻었고, 이로 인해 안동의 김성탁과 상주의 정주원(鄭冑源)은 품계를 뛰어넘어 바로 6품직에 등용되는 은전을 입기도 하였다.

 

 

1735(영조 11) 57세에 울산부사가 되어 다시 외직으로 나아갔다.

 

권상일은 학자적인 관료답게 문풍을 진작시키는데 힘을 기울였다.

 

울산 관내의 구강서원에 기숙사가 없는 것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자신의 녹봉을 덜어내어 기숙사를 지어주었다. 그리고 서원의 각 건물 이름을 새로 지어 붙이기도 하였다.

 

 

때때로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당시 울산지역에 퇴계집이 없는 것을 알고는 퇴계집에 자신의 발문을 붙여 구강서원에 비치해 두고 학생들에게 읽기를 권장하였다.

 

또한 그는 울산의 선비들을 깨우쳐 알리는 글을 지어서 반포함으로써 지역 유생들을 권면하고 분발을 촉구하였다.

 

특히 권상일은 울산 최초의 사찬읍지인 학성지의 편찬에도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독려하였을 뿐 아니라 초본이 완성된 뒤에는 감수를 하고 서문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수령은 한 지역을 대표하는 상징성을 가진 존재였다는 점에서 편찬된 읍지의 공신력과 권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수령은 읍지 편찬에 실질적인 여러 가지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였다.

 

학성지는 당시 울산이 가지고 있던 울산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총 망라되어 있는 인문지리지로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이후 약 200년 만에 울산의 사정을 정리하였다는 점에 편찬의 큰 의미가 있다.

 

1738(영조 14) 60세 때, 4년간의 울산부사 생활을 정리하고 귀향하였다.

 

한편 권상일은 6년 여에 걸친 향촌에서의 은둔 생활을 끊고, 1745(영조 21) 67세에 봉상시정(3, 제사와 시호의 의정에 맡은 관직)에 임명되면서 다시 관직에 나아갔다. 이 때의 심정을 그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스스로 생각하니 문을 닫아걸고 세상 생각을 끊은 지가 이미 오래되어 올라가고 싶지는 않지만, 작년에 의금부의 신문을 받은 데다 지금 또 물러나 앉는다면 명분과 의리상 너무 황송하고, 또 이 직임은 높은 자리를 사양하고 낮은 자리에 처한다는 의리에도 부합하므로 나아가 숙배한 뒤에 곧바로 말미를 받아 돌아오는 것이 도리에 온당하기 때문에 20일 날 행장을 꾸려 길을 나서기로 작정하였다.”

 

다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왕세자 교육을 맡아보던 관청) 필선(4)에 임명되었고, 곧이어 사간원 헌납에 제수 되었으나 오래 있지는 않았다.

 

이듬해인 1746(영조 22) 68세에 다시 사간원 헌납, 성균관 사성, 사헌부 집의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조정에 대한 관심까지 끊은 것은 아니어서 여러 경로를 통해 조정의 동향을 파악하였고, 그에 대한 자신의 소회를 밝히는 데도 소홀하지 않았다.

 

1747(영조 23) 69세에 드디어 통정대부 당상관에 올라 동부승지형조참의 등에 임명되었다.

 

영남 남인으로서는 당상관에 오르기에 쉽지 않은 상황이었음을 감안하면 비록 고령임을 감안하더라도 의미 있는 승진이었다. 더구나 6조와 승정원의 당상관으로서 요직을 담당하게 되어 국왕 영조를 비롯한 다른 붕당의 정국 참여자에게 주는 무게감을 한층 더할 수 있었다.

 

특히 영남지역을 통치와 집권의 기반으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영조와 소론의 주목을 받는 존재로 정치사회적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권상일은 학자로서도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주목받는 존재였다.

 

영조는 어느 잠 못 이루는 밤에 마침 당직을 서고 있는 승지 권상일을 입시하라고 명하여 밤 11시경부터 새벽 4시경에 이르기까지 학문에 대한 문답으로 밤을 지새운 적도 있었다.

 

당시 영조는 밤에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던 듯 그 증상에 대한 이야기를 화제로 하여 마음을 다스리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이날 오고 간 영조의 질문과 권상일의 문답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영 조 : 심신을 한 군데로 모으는 방법으로 무엇이 있는가?

권상일 : 눈을 감고 사념을 끊으면 정신을 안으로 수습할 수 있다.

밤에 잠을 못 자면 몸이 쉽게 손상된, 누워 쉬면서 정신을 모으는 것이 좋다.

영조 : 놓아버린 마음을 찾는 요긴한 방법은 무엇이 먼저인가?

권상일 : 요점은 경()에 있으나, ()가 가장 긴요하다.

영조 : ()와 행()은 경중을 따지자면 어느 것이 중요한가?

권상일 : 선후를 따지자면 지()가 앞이고 행()이 뒤이나, 경중을 따지자면 행()을 무겁고 지()가 가볍다.

 

이러한 마음공부와 관련된 이야기 끝에 영조는 자신이 심감(心鑑)이라는 책을 지은 바 있는데, 홍문관에서 찾아 읽어보고 의견을 말하라고 하였다.

 

영조는 권상일을 유학에 조예가 깊은 유신(儒臣)으로 대우하고 있었던 것이다.

 

1748(영조 24) 70세에 좌부승지(3, 병조에 관한 일 관장)에 체직되어 고향에 머물렀다.

 

1749(영조 25), 75세 때 대사간에 임명되었다가 곧이어 특명으로 요직인 이조참의에 제수되었다. 당시 탕평책을 추진하던 김상로 등이 영남인에게도 이조의 관직을 주도록 청한 때문이기도 하였으나, 특별히 영조가 천망에 어필로 써서 임명하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그때 영조는 이조참의는 특별히 대신에게 문의하여 장망(長望) 명을 내렸는데, 그렇게 오른 후부자 7명에 권상일이 포함되어 있지 않자 직접 명단 맨 아래에 사간원 대사간 권상일아홉 글자를 쓰고 낙점을 하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한 것이었다.

 

이로써 영남인이 이조의 당상관직에 임명되게 되었으니, 탕평의 지극한 공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사간원 대사간, 홍문관 부제학, 사헌부 대사헌 등 삼사(三司)의 최고 관직에 잇달아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거나 병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1753(영조 29), 75세경에 2품으로 품계가 올라 망건에 금관자를 달고 가묘에 고유하였다. 이어 삼대를 추증하는 증직첩도 내렸는데, 그 과정에 근기 남인 수착 채제공 힘을 일부 빌린 것으로 나타나 영남 남인과 근기 남인의 연결 고리를 끈끈하게 이어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붕당을 초월한 주변의 호평과 추천에 힘입어 권상일은 1754(영조 30) 76세에는 한성부 좌윤에 이어 병조참판(2)에 임명되었다.

 

1756(영조 32)에 영조는 특별히 의복과 음식물을 보내어 78세의 그를 위로하기도 하였다.

 

이때 영조는 마침 입시해 있던 이황의 8대손인 교리 이세택에게 이황의 적손이 누구인지를 물어 적손인 이구응을 녹용하라고 명한 후 특별히 전참판 권상일을 지목하여 음식물을 내리라고 명하였으니, 퇴계의 후학으로서 영남을 대표하는 존재로 영조의 머릿속에는 권상일이 각인되어 있었음을 할 수 있다.

 

 

마침내 1758(영조 34) 80세에 정2품 자헌대부에 올라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영예를 입었다.

 

1759(영조 35) 권상일이 81세로 세상을 떠나자, 유림 400여 인이 모여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영조는 예조좌랑을 예관으로 보내어 제사를 지내는 한편 불천위로서 집안 사당에 모실 것을 명하였다.

 

1772(영조 48) 영조는 문득 권상일이 생각난 듯 그의 아들과 손자를 찾아서 특별히 서용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였다.

 

정조는 영조가 남인인 권상일을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한 사실을 인재 등용을 미담 사례로 인용하곤 하였다.

 

 

권상일의 서원 활동

 

청대일기에 의하면 권상일은 1710(숙종 36) 76일에 옥성서원을 알묘한 것, 이후 1739(영조 15) 10월에 옥성서원 원장 추대 시 병을 이유로 사임 단자를 제출한 것을 제외하면 집 근처의 근암서원과 이 시기 상주지역을 대표하는 남인계 수() 서원인 도남서원(道南書院)을 근거로 활동하고 있다. 둘 중에는 근암서원이 주 활동 무대였다.

 

 

이와 같이 권상일은 근암서원, 도남서원을 출입하면서 서원 내의 중요 사에 적극 참여하였는데, 도남서원은 권상일이 20대인 1703(숙종 29) 101일에 친구에 이끌려 처음으로 방문하였고, 30대인 1710(숙종 36) 과거 합격 후 윤 710일에 서원을 방문하여 원장과 재임을 만났고, 이후 40대인 1721(경조 1) 9월 향사에 참석하였다.

 

과거 합격 후 관직과 학문이 깊어지면서 1723(경종 3) 71일에 천망지(薦望紙)가 오면서 도남서원의 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도남서원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근암서원 원장도 역임하였다.

 

특히 그가 주도적 역할을 했던 도남서원이 이 시기 영남 사림들의 정치사회적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시기 서원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의 정치사회적 활동에 권상일의 역할이 매우 컸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권상일은 영남 내에서 위상이 높아지면서, 1733(영조 9) 55세에 영남 남인을 대표하는 서원인 도산서원 원장으로 추대되었다.

 

 

도산서원의 원장을 17세기까지는 향내 인사로 선출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18세기부터는 서원의 안정과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주변 군현으로 확대해 유명 인사를 추대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권상일이 원장으로 추대된 것이다.

 

이는 당시 권상일의 영남 남인 사회에서의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권상일은 원장 취임을 위해 안동으로 길을 나서 108일에 여러 회원이 모인 자리에서 전장(傳掌,사무인계)을 받고 개좌하여 공사원을 선출함으로써 원장직을 시작하였다.

 

이 자리에서 퇴계언행록(退溪言行錄)의 범례를 개정하는 등의 일을 서원 유생들과 논의하였고, 다음 해에 교열하여 간행하였다.

 

이후에도 1210일 제사 일로 다시 도산서원을 방문하였다. 도산서원 원장으로 재직 시 서원의 대표자로서 서원 운영 회의, 서원 건물 수리, 재임 임명, 교육 등 서원 내 중요사를 실질적으로 주관하였다.

 

이해 1212일에서 20일까지 다시 도산서원을 방문하였는데, 이때의 방문은 원장의 자격으로 치제(致祭,제사)를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권상일은 원장직을 사임한 후에도 원임 자격으로, 도산서원에서 보내는 편지 등을 통해 서원의 사정 및 원장 선출 등 서원 운영과 관련한 중요한 내용은 잘 파악하고 있었고 또한 그에 대해 자문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권상일은 1754(영조 30) 1110일에는 진주의 덕천서원(조식 曺植 배향)으로부터 원장 망기(望記)를 받았다.

 

이로써 권상일은 도산덕천서원 즉 경상좌우도를 대표하는 두 서원의 원장을 역임하게 되었다.

 

이는 영남 남인 사회에 있어서 권상일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권상일이 연로하여 덕천서원에 행공 하지는 못하였지만, 이후 덕천서원에서 재임 임명 등 서원의 사정을 알리는 편지를 수차례 보내왔다.

 

덕천서원은 남명학파의 본산으로 광해조 북인 집권기에 북인계를 대표하는 서원이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북인정권이 몰락한 이후 친 남인계로 기울었다.

 

덕천서원은 북인의 몰락 이후 향촌사회 내에서 독자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어려웠고, 따라서 서원 존립을 위해 남인의 본거지인 경상좌도와 재경의 남인계 인사들과 연결을 도모하였다.

 

그 일환으로 덕천서원은 원장을 향내 인사로 한다는 이전의 관례를 깨고 경종 이후부터 남인계 재경관료 및 명망있는 남인계 인사로 추대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권상일이 원장으로 추대되었던 것이다.

 

 

권상일의 서원 교육활동

 

서원의 교육활동은 17세기 후반 이후 점차 약화되어 가는 추세에 있었다.

그러나 18세개 이후에도 서원에 따라서는 유생들의 자발적인 공부와 거접강회 및 지방관이 주관하는 백일장 등 교육활동이 꾸준히 계속되어 왔다.

 

이 시기 서원을 교육활동의 침체는 서원의 성격 변화와 무관하지 않지만, 특히 서원의 경제력 약화가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현재까지 조사된 바에 의하면 영남지역 서원의 유생들에 대한 교육활동 관련 구체적인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청대일기는 자료적 가치가 크다.

청대일기에 의하면, 권상일이 주로 활동하였던 18세기 전반에 상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유생들의 교육활동에는 관의 역할이 일정하게 작용하였다고 보인다.

 

먼저, 1703(숙종 29) 1청대일기에 기록된 관찰사의 흥학책을 보면 다음과 같다.

 

관찰사가 지난달 여러 읍에 분부하여 여러 유생의 강경(講經)과 제술(製述) 계획안을 작성하도록 했다. 관아에서 각 면의 훈장에게 제술은 고을 수령이 고사(考査)하되 장원 답안지는 깨끗하게 써서 감영에 보내며, 강경은 훈장이 맡도록 계획하여 관아에 보고하도록 알렸다. 이런 까닭으로 서원 제사에서 막 강회를 개설했기에 가서 참석하였다.”

 

경상감사 조태동은 각 읍 유생들의 교육활동을 독려하기 위해 유생들의 강경과 제술안을 작성하여 제출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각 서원에서 강회를 개설하였는데, 이 모든 과정은 수령 책임하에 진행하도록 했으며, 그 결과는 감영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유생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 활동은 흥학에 관심이 있는 수령도 마찬가지였다.

 

17049월 상주목(목사 元聖俞)에서는 서당 첩()을 내려 매달 초하루에 각 면의 유생 및 동몽이 강과 제술을 하도록 하고, 강은 경서 2권을 읽은 후 그리고 제술은 6()를 짓고 2개월 마다 모두 읍내로 모아 수령이 직접 시험을 보인 다음 상과 벌을 내린다고 하고 따라서 서당에서 시급히 강술안을 작성하여 관아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관 주도의 교육활동에 대해서 권상일은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상주 목사가 흥학에 관심이 있을 경우 각 서원에서는 강회 일정을 관에 보고 하기도 하였다. 1754(영조 30) 5월에 근암서원에서 상주 목사와 권상일이 강회의 분위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17, 아침에 상주 목사 방문, ()을 열었는데, 모든 강생이 서로 즙()하는 예를 행하고 대학1부를 강함. 강을 할 때 글 뜻을 대략 묻고, 강하는 유행 10인이 차례로 돌아가며 읽음. 저녁에 마침

 

-18, 강서(講書)1권을 다 읽고 나서 의문이 나는 곳은 질문 항목을 만들어 각자 견해를 시지에 써 대답하게 함. 모든 유생도 스스로 어려운 것을 질문하며 변석(辨釋). 저녁에 마침.

 

-19, 모든 유생에게 근사록첫 권의 태극도설, 定性書西銘의 문장이 어려운 곳에 대해서도 대학을 강할 때와 같이 하였다. 상주 목사 돌아감.

 

여기에서 보면 상주 목사가 근암서원 강회에 3일 동안 머무르고 있었고, 그 내용 면에서 보더라도 엄격하게 진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흥학에 관심이 있는 상주 목사는 때대로 서원을 방문하여 강회를 개최하는 경우가 있었다.

 

 

1724년에는 상주 목사가 1월에 도남서원을 방문하여 권상일과 함께 강론하고, 4월에는 옥성서원에서 40여 인이 모인 자리에서 심경을 강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자리에는 권상일도 상주 목사와 함게 참가하여 강회를 주도하였다.

 

권상일은 과거에 합격한 후 중앙의 관료 생활을 거치면서 점차 학문과 지역 내 명망이 높아졌다.

 

이때부터 권상일은 근암서원과 도남서원을 중심으로 거재, 강회 등을 주관하였으며, 이러한 서원과 서당 등을 중심으로 개최되는 거접이나 백일장 및 순제의 답안지 평가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교육활동을 하였다.

 

 

17235월 순제에 대한 다음의 기록이 있다.

 

“(51)...(근암서원) 원장 및 근처의 노소 10여 인이 모여서 비로소 우리 면의 순제를 채점하였다. 대개 한 달에 열 개 제목을 (시부를 합치면 20) 내기 때문에 거두어진 시권이 많게는 300여 장에 이른다. 유생들이 만약 열 개 제목을 다 짓는다면 5~600 장은 되지만 대부분 그렇게 짓지 않으니 안타깝다. ... (52) 오전에 채점을 마쳤다. 장원을 한 세 사람 조국룡권상룡채식에게는 각각 종히 한 권씩을 주었다.”

 

여기에서 보면 순제의 문제는 시부 각 10문제씩 출제됨을 알 수 있는데, 권상일은 근암도남서원을 중심으로 한 활동뿐만 아니라, 학문적 명성이 높아지면서 인근 서원 등에서 개최하는 백일장 등에 초청받아 참석하기도 하였다.

 

1723(경종 3) 7월에는 유생 100여 인이 참가한 임강서원(臨江書院) 백일장에 초청받아 가서 시와 부의 문제를 출제 하였다.

 

1727(영조 3) 1월에는 2일간 개최된 용궁 삼강서원 백일장에 초청되어 참가하였다. 이 백일장에는 노소 150여 인이 참가하였다.

 

1748(영조 24)에는 검호(劍湖) 송정(松亭)에서 개최하는 임호서원의 소학도강(都講)에 초청되었다.

 

특히 권상일은 학문적 명성이 높아지면서,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근암도남서원 등에서 상주 목사와 함께 자주 유생들에게 강론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 속에서 권상일은 서원의 본래 공부는 강학이라고 생각하였다.

 

근래 학궁에 선비 기르는 법이 다 없어져서 강학 한 가지만 가망이 없는 것 아니라, 과문(科文)을 권장하는 것도 폐지되었다. 그래서 우리 면에서 이번에 비로소 시도하여 보는 것이다. 서원은 강학을, 서당은 과문을 위주로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여기에서 보면 강학과 과문을 분리하여 서원에서는 강학을, 서당에서는 과거 공부를 위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벼슬보다는 학문을 더 중요시하는 이러한 생각은 노론 정권하에서 운신의 폭이 좁았던 영남 남인 사회에서 일반적인 경향이었지만, 근본적인 것은 서원에서의 공부는 위기지학이여야 한다는 퇴계 서원론을 계승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본다.

 

 

권상일의 근암도남서원을 중심으로 한 강학활동에 대해 황반로(黃磻老)도남강회록서(道南講會錄序)에서, 이상정이 주도한 안동 여강서원에서의 강학 활동과 더불어 18세기 영남지역 서원의 대표적인 강학 활동으로 기록하였다.

 

 

또한 지역의 후학인 정종로는 권상일의 강학 활동을 다음과 같이 함축했다. “우리 고향에서는 청옹(淸翁)이 돌아가신 이후에 적막하여 강학두 글자를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청대일기는 장기간에 걸쳐 기록된 것이기에 그 자체만으로도 자료적 가치가 크다. 또한 당대 명망있는 유교적 지식인이 작성했다는 점에서 17세기 조선사회의 모습, 곧 역사의 한 단면을 정밀하게 추적해 볼 수 있기에 자료적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이어지는 6차시(912) 강의는 문화유산 현지답사이다. 답사지는 부산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부산송도해상케이블카 등 현장체험이다.

 

 

마지막 강좌 7차시(919) 강의는 사근도 형지안을 통해 본 조선시대 문경지역의 역()과 역인(驛人)이다. 강사는 임학성 인하대학교 사학과 교수이다. 강좌 후 수료식(16:00~16:30)이 있을 예정이다.

 

 

기타 상세한 사항은 문경시 문경새재관리사무소 옛길박물관(경북 문경시 문경읍 새재로944 054)550-8366으로 문의하면 된다.

관련글 더보기